사람이 무나 두부도 아니고, 단칼에 잘라냅니다. KBS 2TV '홍김동전'과 '옥탑방의 문제아들', KBS 1TV '역사저널 그날'까지 이어지던 개편을 빙자한 무례한 칼바람이 KBS 1TV '전국노래자랑' 김신영 하차 통보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SBS 파워FM에서는 김창완이 '아침창' 마지막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인을 사람답지 못하게 대하는 방송가 분위기가 실망감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무수한 칼바람이 방송가를 휩쓸고 있습니다. 시작은 지난 1월 KBS 2TV 예능 프로그램 '홍김동전'과 '옥탑방의 문제아들(약칭 옥문아들)'의 잇따른 폐지였습니다. 다음 달에는 KBS 1TV '역사저널 그날'이 시즌을 종영했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의 시즌 종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명절 연휴에 갑작스러운 종영 소식은 보는 많은 이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습니다.뒤이어 가장 많은 이들을 폭발하게 만든 사건은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 김신영의 하차입니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난 故 송해 선생님의 뒤를 이어 1년 6개월 가량 활약한 김신영이지만 하루 아침에 갑작스러운 하차 통보를 받고 New MC로 방송인 남희석이 확정됐습니다.

 

여기에 14일 아침 SBS 파워FM(수도권 기준 FM 107.7㎒)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약칭 아침창)'에서 DJ 김창완이 마지막 고별 생방송을 진행했습니다. 비록 그는 휴식기를 가진 뒤 2024년 하반기쯤 SBS 러브FM(수도권 기준 FM 103.5㎒)으로 자리를 옮긴다고는 하나 23년 동안 이어온 '아침창'을 떠나며 흘린 눈물은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심지어 같은 날 오후 SBS TV 간판 시사 교양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종영설까지 제기됐습니다. 봄 시즌을 방송가 사람들은 '춘궁기'라고 부릅니다. 봄만 되면 시청자들이 좋은 날씨에 나들이를 즐기며 TV에서 멀어지는 만큼 시청률 회복은 힘들고 추락만 쉽다는 말이 통용되는 여파입니다. 과거 MBC TV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도 이를 대비한 특집이 구성됐을 정도입니다. 자연스레 봄을 앞두고 이뤄지는 개편 칼바람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방송가의 하차, 폐지 등은 유독 살벌합니다. 특히 '안정감'이 색깔이기도 한 지상파 방송국 3사(KBS·MBC·SBS)에서 먼저 시작된 폐지 칼바람이 더욱 스산하게 다가옵니다.

 

이를 감안해도 최근 방송가들의 변화에 많은 이들이 유독 분노하고 있습니다. 당장 하차, 폐지 시점을 두고 촉박하다는 지적이 큽니다. 법적으로 근로자들을 해고 하기 전에는 최소 한달 전에는 통보해야 합니다. 프리랜서 형태인 방송 근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 한달 전에는 통보 해야 하는 규칙이 있지만 방송일 기준인지, 마지막 녹화일 기준으로 한달인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일찌감치 녹화가 준비되는 프로그램들의 경우 방송일로는 한달이 남았지만 녹화일 기준으로는 당일에 가깝게 하차 통보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TV 수신료 분리 징수 위기, 방송 광고 시장 1조원 미만 추락의 우려 속에 방송사들이 허리띠를 졸라메야 하는 속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닙니다. 산업이 흔들리는 마당에 출연자, 제작진 개개인과 작은 집단을 챙기려다 방송사 기뚱 뿌리가 뽑힐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최근 국내 방송가 사정이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금전적 당위성을 강요하는 무례한 칼바람 속에 콘텐츠 산업의 본질인 '이야기'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극적인 영화나 드라마가 됐건, 웃음을 주는 예능이 됐건, 노래와 춤으로 무대를 꾸미는 가요가 됐건 적어도 세계 어디를 가도 콘텐츠 산업의 본질은 한 편의 그럴싸한 이야기 혹은 이미지를 팔고 그 안에서 씹도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거리들을 선사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 매력에 이끌린 사람이 모야 이 바닥의 돈이 됩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을 구성하는 '사람'을 산업의 톱니바퀴, 파편 하나 쯤으로 치부하는 단면이 보이지 않는 장막을 거두게 합니다. 방송사가 파는 그럴싸한 이야기를 믿고 즐기겠다는 대중과 화면 사이 무언의 약속을 처절하게 깨부숩니다. 당신이 즐기는 어떤 드라마, 영화, 예능, 노래 모든 게 누군가 돈을 벌고 수익을 내기 위한 산업이라고 폭로하는 순간, 어떤 콘텐츠라도 매력은 휘발되고 콘텐츠의 가치는 반감됩니다.

과거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들에서 우스갯소리로 방송은 숨 쉬는 것도 가짜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얼마나 그럴싸하고 세련되게 보여주는 지가 방송의 만듦새, 작가의 개연성과 감독의 연출력, 출연자의 연기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입니다. 어떤 콘텐츠는 그 만듦새를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려 보여줌으로써 수상 트로피를 거머쥐고 카타르시스를 선사함으로써 명예를 가집니다.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대중예술과 '프로그램 폐지'나 '출연자 하차', '개편'이라는 당연하지만 폭력적으로 드러나는 실체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습니다.

매니지먼트 회사들이 소속 아티스트와 소속사 간 결별을 'FA'와 '아름다운 이별'로 표현하는 이유도 다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가벼운 이직, 고용주의 변화 같은 돈의 문제도 스타를 위한 팬심을 생각해 살뜰하게 표현하는 게 예의이고 생리입니다. 방송가 하차에도 세련된 이별, 예의 바른 마무리가 필요합니다. 더 이상 제 발로 누군가의 웃음이나 꿈과 희망을 '와장창' 박살 내버리는 사람들에게 대중이 시간을 할애할 이유도 애정도 없지 않을까요? 적어도 손 쉽고 간편했던 폐지와 하차, 개편 따위의 말들로는 이제는 충분하지 않은 시대입니다.

이소정 앵커에서 김신영 MC 하차까지…박민 사장 취임 후 상징적 여성 삭제

KBS가 혁신과 변화의 상징으로 내세웠던 여성들을 지우고 있습니다.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웠던 고 송해 MC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던 김신영 씨가 1년 5개월 만에 하차 당한 사건은, KBS에서 최소한의 성평등 구현 의지가 후퇴하고 있다는 우려에 쐐기를 박았습니다. 공영방송 KBS가 여느 방송사보다도 시대 변화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먼저 KBS에서는 박민 사장 취임 첫날인 지난해 11월 13일부터 '윗선'에 의한 시사·보도 프로그램 진행자 교체와 하차가 잇따랐습니다. 그중에서도 KBS 1TV '뉴스 9'의 가장 큰 변화는 이소정 앵커의 하차였습니다. 이소정 앵커는 지난 2019년 지상파 방송국에서 처음 여성으로서 평일 메인 뉴스, 메인 앵커로 발탁됐습니다. 당시 사례는 이소정 앵커의 역량을 고려한 결정이면서도, 공영방송이 '나이 든 남성 메인 앵커와 젊은 여성 서브 앵커'라는 성차별적 관행을 깨기 시작한 상징적인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이소정 앵커의 돌발 하차로 KBS는 4년여만에 지상파 방송국 3사(KBS·MBC·SBS) 중 유일하게 메인 뉴스 프로그램에 '여성 메인 앵커'가 없는 방송사가 됐습니다. MBC TV '뉴스데스크'와 SBS TV '8 뉴스'도 평일에는 남성 메인 앵커와 여성 서브 앵커 체제로 운영되지만 대신 주말에는 각각 이지선과 정유미 앵커가 단독으로 뉴스를 이끌고 있습니다. 현재 KBS 1TV '뉴스 9'는 평일과 주말 모두 기자 출신의 남성 앵커(박장범·김현경)가 메인, 아나운서 출신의 젊은 여성 앵커(박지원·박소현)가 서브 앵커를 맡고 있습니다.

시사 라디오 부문에서 여성 관점의 시사프로그램을 표방해온 '뉴스 브런치'가 폐지된 일도 상징적입니다. 2019년부터 방송되어온 '뉴스 브런치'는 여성 진행자 외에도 대부분 출연진을 30~40대 여성 전문가로 구성해, 진행자·출연자가 특정 성별에 편중된 시사 라디오 시장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지난 2022년 KBS 성평등센터·공영미디어연구소가 자사 콘텐츠 다양성을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성소수자, 환경, 장애 등 주류 언론에서 잘 다루지 않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프로그램을 차별화했다”라고 평가했던 프로그램입니다.

그러나 KBS는 올해 1월 '수시조정' 명목으로 상당수 프로그램을 폐지하면서 '뉴스 브런치'를 없앴습니다. 이전까지 '뉴스 브런치'를 진행했던 신성원 아나운서는 현재 '오늘 세계는'이라는 국제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시청자들의 강한 반발 속에 폐지가 강행된 2TV 예능 '홍김동전' 역시 여성 방송인들이 주도적인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홍김동전'은 홍길동전에서 모티브를 얻어 여성 메인 MC인 '홍진경', '김숙' 이름과 '동전'을 합쳐 만든 제목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국의 전통적 예능 포맷과 공영방송 특유의 공익적 소재가 어우러진 홍김동전은 두 여성과 장우영, 조세호, 주우재 등 남성 출연진이 활약하며 '레트로 예능' 성공 사례로 꼽혔지만 '시청층 확대 한계', '재정 위기' 등을 이유로 사라졌습니다.

지난달에는 KBS 1TV의 대표적 역사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이 '시즌 종료'되면서 여성이 MC를 맡은 프로그램이 또 하나 사라졌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은 2013년 1회 방영 때부터 최원정 아나운서가 진행해왔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경우 일부 제작진이 진행자 변경에 반발한 가운데 갑작스러운 '리뉴얼'이 결정됐다고 KBS 노동조합 성명 등을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

일련의 사태를 둘러싼 우려는 '전국노래자랑' 김신영 MC 하차를 계기로 터져나왔습니다. KBS 사측이 김 씨에게 마지막 녹화를 약 일주일 앞두고 하차 통보한 가운데, KBS 내부에서 “젊은 여자 MC는 (프로그램 특성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김 씨 하차를 비판하는 시청자 청원이 쇄도하자 KBS는 “프로그램마다 그 특성과 주 시청자층을 고려한 MC 선정이 꼭 필요하다”라며 김 씨 진행에 대해 불만 의견이 칭찬 보다 더 많이 접수됐다고 답해 또 한 번 논란을 불렀습니다. KBS는 지난 2022년 김신영 씨를 발탁하며 '전국노래자랑'이 젊은 여성 MC와 새로운 출발을 한다고 홍보했고, 지난해 그가 포함된 'KBS를 빛낸 50인' 명단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KBS의 이 같은 대응은 스스로 공영방송으로서 추구해온 역할과 목표에 반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KBS는 5대 핵심 비전 중 하나로 '다양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2020년에는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에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조항과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안내서'(여성가족부) 등을 수록했습니다. 제작안내서는 방송을 제작할 때 남성과 여성 모두를 균형 있게 대표할 수 있어야 하며,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특정 성이 보조 혹은 장식적인 역할만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총회 일환으로 열린 'ABU 여성포럼'에서 KBS는 연맹 소속 방송사들과 미디어의 성평등·다양성·포용성 구현을 약속하는 '서울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5월엔 KBS가 성평등한 조직문화 및 콘텐츠를 지향하기 위해 진행해온 '성평등 이니셔티브'로 아시아태평양 방송개발기구(AIBD) 국제미디어상 '지속가능성 부문'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이에 역행하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김언경 미디어인권연구소 뭉클 소장은 최근 KBS 상황을 두고 “'해사행위'인가라는 판단이 들 정도”라고 비판했습니다. 김 소장은 “'전국노래자랑' MC로 김신영 씨를 선택한 건 KBS의 변화를 보여주는 굉장히 큰 사례였다. 공영방송은 올드하거나 진부한 것이 아니라 공영적 가치를 잘 지키며 변화해나간다는 걸 보여준 것이 故 송해 선생님의 후임으로 젊은 여성을 기용한 의미였다”라며 “(김 씨 하차는) 절차도 적절하지 않고 굉장히 일방적이었다. 시청자 청원에 대한 답변이 굉장히 무례했고, 우리 사회에서 젊은 여성을 평가하며 유난히 감정선을 건드리는 것이 드러났다”라고 꼬집었습니다.

김 소장은 나아가 “공영방송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앵커'의 모습을 통해 국민이 받는 메시지가 있다”라며 “KBS가 한 것들은 여성 차별을 해도 되는 것으로 느끼게 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빨리 시정해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정슬아 한국여성민우회 성평등미디어팀장은 “KBS는 2018년 성평등센터를 국내 방송사 최초로 개소했다는 프라이드를 가져온 곳이다. '조직 내 성평등 문화 확산'을 지금도 홈페이지에 적어두고 있다”라며 “공영방송은 시청률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럼에도 가져가야 하는 가치와 그에 맞는 프로그램 내용, 주제, 구성이 있어야 한다. (과거로) 복귀하는 건 변화된 흐름을 못 읽고 퇴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평등 여부를 평가하려면) 어떤 성별이 어떤 중요도와 내용의 말을 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여성이 등장해야 여성의 멘트가 어떤지를 판단할 수 있는데 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면서 “KBS가 ABU 총회에서 성평등, 다양성, 포용성을 넓히기 위한 프로그램을 발굴하고 확산하겠고 선언했는데, 자사에서도 발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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