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레이온 참사는 어떻게 노동자들의 목숨을 빼앗았나요?

29일 방송된 SBS TV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마을의 숨겨진 살인마 - 사라진 308명'이라는 부제로 최악의 직업병 참사 원진 레이온 참사를 조명했습니다.

1970년 남양주의 한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절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80여 명이 기절을 하고, 배수구를 뚫으러 맨홀에 들어간 세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았던 주민들 중 무려 1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충격을 안겼습니다. 또한 쓰러진 사람들 중에는 갑자기 팔다리가 마비되고 감정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이상 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답답한 말만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병명을 밝히기 위해 사당 의원을 찾았고, 이곳의 김록호 원장은 이들의 상태를 보고 곧바로 병원을 뛰쳐나가 서울대 의대 도서관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김록호 원장은 도서관에서 이들의 병명을 찾아냈습니다. 이들은 바로 이황화탄소 중독이었던 것입니다.

김 원장을 찾은 환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한 인견사 제조사의 노동자였던 것입니다. 이황화탄소는 이들이 제조하는 레이온을 만들 때 쓰이는 재료인데 이것에 단기간 고농도 폭로로 급성 중독되면 즉시 혼수상태로 빠져 사망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살 경향 등의 정신과적 증상, 중추신경계장애, 말초신경계장애 등의 만성중독증의 증상이 이황화탄소 중독증에서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인견사 제조사인 원진 레이온, 모든 것은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6년 남양주에 공장이 생기면서부터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공장이 세워진 후 주변의 나무들이 죽고 주변의 철제들이 모두 부식되었습니다. 외부도 이런데 내부는 더욱 끔찍했을 터입니다. 화학 가스가 방사되는 한가운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도 모른 채 일을 했습니다.

해외에서는 이미 발현됐던 이황화탄소 중독을 회사에서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어떤 대책도 없이 몸이 안 좋다는 직원들을 다그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개인 문제라는 회사의 이야기를 믿고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며 병들어 갔습니다.

39세 김봉환 씨는 어느 날부터 손 발이 마비되고 두통이 심해졌습니다. 이에 그는 6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건강 상태가 나빠져 퇴사한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병을 몰랐던 사람들 앞에 김록호 원장이 등장했고, 그는 환자들에게 "여러분들의 병명은 이황화탄소 중독이다. 이를 직업병이라고 한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사장실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사장실은 텅 비어 있었고, 사장실에서 노동부가 발급한 무재해 인증서와 34명의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을 산재 처리 대신 공상 처리한 서류를 발견하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공상 처리란, 회사에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한 번의 보상으로 끝나는 것으로 회사에서는 산재 처리보다 훨씬 유리한 방식이었습니다.

1962년 경제성장이 목표였던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한일협정 체결 후 일본이 넘긴 중고 레이온 기계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일본 측은 사과 하나 없이 배상금에 중고 레이온 기계값을 포함시켰고, 당시 36억 엔(현재 900억 원의 가치)의 배상금을 기계로 대신했습니다.

더 큰 이익을 꿈꾼 정부는 대표 친일파 1호 화신 그룹 총수 박흥식의 말을 믿고 해당 기계를 받았습니다. 일본에서도 직업병 발생으로 골칫덩어리였던 레이온 기계를 들여온 박흥식은 그 후 회사를 넘겨버리고 떠났고, 그 후 20년 동안 죄 없는 우리 노동자들만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1988년 힘을 합친 노동자들은 회사와 노동부에 책임을 물었지만 어느 누구 책임을 지는 이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들의 상태는 악화되었고, 숨을 거두는 이들이 늘어갔습니다.

이에 노동자들은 88 올림픽 성화봉송로를 막고 시위를 벌였고, 이에 올림픽 개막 3일 전 회사와 협상 자리가 차려졌습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질병을 직업병이라고 판정하고, 산재 처리 해달라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직업병 판정단에 김록호 원장을 포함해 노동자 측 의사 3명을 포함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국내 유명 대학 교수 3명으로 구성된 회사 측 의사들은 동네 가정의학과 출신의 노동자 측 의사들의 어떤 증명도 받아들이지 않고 개인의 질환이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환자들에게 단백뇨가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신장 조직 검사에서 특이 소견이 나온다면 산재를 인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김록호 원장은 고민 끝에 조직 검사를 진행했고, 검사를 통해 이황화탄소 중독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증상들을 포착했습니다. 이에 양측 의사들은 결과를 인정했고, 이에 40여 명의 노동자들의 직업병이 인정됐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먼저 회사를 떠났던 봉환 씨는, 뒤늦게 사당 의원을 찾아 진료를 받았고 병명이 적힌 소견서를 들고 회사로 가서 요양 신청과 함께 산재 처리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회사 측은 그가 비유해 부서에 근무했기 때문에 신청 대상이 아니라고 돌려보냈습니다. 회사는 보상 인원을 줄이기 위해 일부 부서만 유해 부서로 지정하고 3분의 2의 다른 곳은 비유해 부서로 분류했던 것입니다.

몇 번이고 애원한 끝에 3개월 만에 노동부에서 예외적으로 요양 신청을 해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요양 신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노동부의 연락을 받은 그날 딸의 입학금을 내고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의 비극은 동료들에게 전해졌고, 이에 한마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장례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록호 원장도 함께했습니다.

투쟁 4개월 만에 국회가 뒤늦게 현장 조사를 했고 원진 레이온의 비유해 부서 직원들도 이황화탄소 중독될 개연성이 충분해 보인다며 원진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직업병을 인정했습니다.

이후 1993년 원진 레이온은 폐업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있던 레이온 기계는 중국으로 수출했습니다. 이에 원진 노동자들이 중국 대사관에 찾아가 실상을 알렸으나 중국은 이를 무시하며 중국의 노동자들을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최악의 직업병 참사 원진 레이온 참사로 피해노동자 950여 명 중 308명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공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부지를 판 금액의 일부를 보상금으로 받은 노동자들을 다 함께 모여 노동자를 위한 병원 원진 녹색병원을 세웠고, 초대 원장은 김록호 원장이 맡았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의 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방송은 현재 스위스 제네바 WHO에서 근무 중인 김록호 원장의 근황을 전하며 "질병을 낫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질병을 앓게 된 환경까지 고쳐 나아가는 것이 의사가 할 일"이라는 그의 신념을 되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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