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악의 안전사고로 기억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입니다.

이날 영업중이던 백화점을 찾았던 수많은 손님과 직원 등 1000명 넘는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렸습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다쳤으며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은 40명에 불과했습니다. 생존자들도 이후 트라우마 등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애초 부실공사였던 데다 사고 이전 수많은 전조현상이 나타났음에도 대책이 미흡했습니다. 건축물 안전관리가 허술하고 각종 제도가 미비하면 얼마나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 1. "뚝…드르륵" 붕괴 징후에도 "영업 계속"
28년 전 오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 지금의 서초중앙로 188 일대의 삼풍백화점은 불안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은 백화점으로 쓰던 A동과, 레포츠센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는 B동으로 나뉘었는데 A동에서 균열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5층 식당가는 바닥이 서서히 기울었고 천장의 균열로 콘크리트 알갱이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루 전인 6월 28일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옥상이 내려앉으면서 철근 기둥이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이른바 펀칭 현상입니다. 경비원이 순찰중 식당 바닥에 싱크홀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붕괴의 전조였습니다. 즉시 건물을 비우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책 없이 6월 29일 날이 밝았습니다.

사고 당일, 4~5층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거나 '드르륵' 하는 진동이 감지됐습니다. 경영진은 옥상 냉각탑의 진동이라도 줄이려 에어컨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그날 백화점 내부가 너무 더웠다는 생존자들 증언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후엔 긴급히 부른 전문가가 안전진단을 실시했습니다. 건물 균열이 심각하므로 당장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 보수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너인 이준 삼풍 회장, 아들 이한상 사장 등 경영진도 모였습니다. 그중 일부는 즉각 손님들을 대피시키자고 건의했지만 최고 경영진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영업 중단 시 경제적 피해와 이미지 손상만 생각했습니다.

결국 보수 공사를 하기로 했지만 영업은 계속했습니다. 이때라도 손님들을 내보내고 백화점 문을 닫았다면 건물이 무너졌어도 피해규모는 줄였을지 모릅니다.

★ 2. 사망 502명·900여명 부상 초유의 참극

이처럼 여러 차례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모두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일 오후 5시를 지나며 천장에서 시멘트가 떨어지거나 파열음이 들렸습니다. 붕괴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일부 직원과 고객들은 대피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5시 57분, 5층 슬래브가 폭삭 주저앉으면서 4층을 짓눌렀습니다. 이 충격이 아래로 그대로 전달되며 4층부터 지하 3층까지 순식간에 포개지는 수직 붕괴가 발생했습니다. 지상 5층, 지하 4층 건물이 무너지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고 이후 현장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 처참하게 깔렸고 부상자들은 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중장비 수십대, 구급차 소방차 등 100여대가 왔지만 초기 수습은 어려웠습니다. 주변 도로가 꽉 막히면서 구급차 진출입이 난항을 겪었습니다. 중장비를 현장 가까이 대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남아있는 A동의 바깥 부분과 B동 전체도 안전하지 않아 2차 붕괴 위험이 컸습니다.

군경, 소방대원 등이 수작업으로 구조 및 수색에 나섰습니다. 하루 뒤부터 생존자들이 구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고일부터 11~17일 지난 기간에 차례로 구출된 최후의 생존자 3명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최명석(남성), 유지환(여성), 박승현(여성) 입니다.

당시 뉴스 중계를 보면 "가스 폭발에 의한 사고로 추정된다"라는 멘트도 나옵니다. 멀쩡해 보이던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았다는 사실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은 대체 왜 무너졌을까요?

★ 3. 공사도 안전관리도 부실·무책임

삼풍 소유주 이준 회장은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정보부를 나온 뒤 부동산과 건설업에 눈을 떠 사업을 키웠습니다. 그의 삼풍건설은 1974년 강남의 미군 숙소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이후 강남개발이 본격화하며 엄청난 땅값 상승 차익을 누립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 백화점 건물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무시했던 걸로 보입니다. 이곳은 애초 주거용도여서 상업시설을 지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서울시에서 용도 변경을 받아냈습니다.

공사 기간 수차례 구조변경을 했는데 안전과는 거리가 먼 방향이었습니다. 자재 비용과 공기를 줄이려 기둥은 계획보다 가늘어졌고 안전을 위한 시공은 무시됐습니다. 탁 트인 내부공간을 만들고, 하나라도 많은 매장을 넣고자 원래 있어야 할 벽체는 사라졌습니다.

1989년 준공과 개장 이후도 문제였습니다. 옥상 냉각탑을 무리하게 옮기면서 진동과 무게가 가중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삼풍백화점은 사고가 일어나기 수 년전부터 조금씩 이상이 감지됐습니다.

★ 4. 회장일가 전재산 헌납…흔적없이 사라진 회사

사고 이후 여론은 극도로 악화했습니다.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요구가 들끓었습니다. 이준 회장은 업무상 과실치상, 뇌물공여죄 등이 적용돼 7년 6개월형을 받았습니다. 아들 이한상 사장은 7년형이었습니다. 당국 공무원들이 형식적으로 준공을 승인하거나 사용허가를 내준 사실도 나중에 드러나 관계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이준 회장 일가는 추징금에다 손해배상금 재원으로 써달라며 전재산을 서울특별시에 헌납했다. 손해배상 처리 또한 서울시에 일임했다. 서울시는 이 돈에 시 재원을 더해 사망자 유족 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백화점을 운영하던 삼풍건설은 사라졌고, 관계를 맺고있던 중소기업들도 부도가 났습니다. 삼풍 직원은 물론이고 관계사 임직원들까지 일자리를 잃는 고통을 겪은 셈입니다.

다만 이 사고에 국가배상 책임은 없는 걸로 대법원이 판결했습니다.

백화점 A동 붕괴 후에도 B동은 서 있었으나 이 또한 붕괴위험이 큰 걸로 나타나 폐쇄됐습니다. 이어 1998년 10월부터 철거했습니다. 이 자리에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가 건설됐습니다. 백화점 바로 옆에 세웠던 삼풍아파트는 지금도 건재한 가운데 재건축을 추진 중입니다.

★ 5. 사고 그후, 달라진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안전과 생명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극적으로 높였습니다. 건설, 소방 방재, 의료계 등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건설업계에선 이 건물처럼 천장과 기둥 사이에 보를 쓰지 않은 건축법은 기피하게 됩니다.

소방, 의료, 경찰 등은 각각 사고수습 현장본부를 뒀지만 이들을 통솔하는 컨트롤타워가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같은 대형 재난 사고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메뉴얼을 갖추지 못한 게 대한민국 현실이었습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사고 현장을 사상 최초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소방본부가 화재진압뿐 아니라 각종 안전사고 대응까지 맡도록 바뀌었습니다. 소방본부에 119 구조단을 신설한 것도 이 사고 이후입니다.

한편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1995년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았고 이듬해 19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서울 양재동 양재시민의숲에는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습니다.

※ 참고 자료 : SBS TV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편(202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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