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설정과 무리한 전개를 거듭하면 '막장 드라마'가 됩니다. 과장된 캐릭터, 비약과 궤변, 황당한 결말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개연성 없는 막장 드라마'라며 손가락질합니다.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막장 드라마의 단 하나 장점을 꼽는다면 그래도 결말은 권선징악이란 점입니다.

그런데 2024년 현재, 서울시 목동 방송회관에서 매주 라이브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 단 하나의 장점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구성된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이하 선방위)는 1997년 선방위가 법정기구로 제도화된 이후 가장 역대급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싶을 만큼 그 내용이 파격적이고 황당무계합니다. '개연성 없는 막장 드라마'는 욕하고 채널을 돌릴 수라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이 '선방위 시리즈'는 우리 앞에 엄존하는 현실입니다. 채널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초현실적인 파행이 어디까지 계속될지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 막장 드라마 뺨치는 선방위 파행 ★

이번 선방위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예비후보자 등록 신청 개시 전날인 2023년 12월 11일 출범해 선거일 30일 뒤인 2024년 5월 10일까지 6개월간 운영됩니다. 선방위가 법정기구로 처음 제도화된 것은 1997년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에 8조2항 선거방송심의위원회에 관한 조항이 신설된 때부터입니다.

이후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은 '공직선거법'으로 명칭이 바뀌고 '선거방송심의위원회의 구성 및 운영에 관한 규칙'도 몇 차례 개정되었으나 설치 목적은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자구수정 없이 동일합니다. '선거방송의 공정성을 위하여' 운영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거방송의 공정성을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선방위가 이번 총선 선거방송의 공정성을 해치는 최고 '빌런'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3월 14일까지 선방위가 10차례 회의를 여는 동안 법정제재 건수가 벌써 12건입니다. 앞으로 5월까지 활동기한이 더 남은 점을 감안하면 역대 최다 법정제재 건수를 기록하는 선방위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정제재를 받으면 방송사 재허가, 재승인 심사 때 감점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최악의 경우 방송사가 문을 닫거나 팔려나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중징계 건수뿐만 아니라 징계대상의 편파성과 집중성에 있어서도 가히 최고 기록이라 할 만합니다. 지금까지 MBC 표준FM <신장식의 뉴스 하이킥>에만 법정제재가 7건, YTN 뉴스FM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 2건이 내려졌고, CBS 표준FM <박재홍의 한판승부>·MBC 표준FM <김종배의 시선집중>·울산 MBC TV <MBC 뉴스데스크 울산>이 각 1건씩입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는 지난 15일 성명을 통해 "2008년 이후 선방위가 '관계자 징계'를 내린 것은 단 두 차례에 불과했지만, 이번 선방위는 출범한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았음에도 MBC에만 '관계자 징계'를 다섯 차례나 내린 것"이라며 "선방위 등의 벌점 테러는 MBC를 무너뜨리려는 정권 차원의 계산된 움직임이며, 살고 싶으면 입 다물고 권력에 충성하라는 공개 협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 미세먼지 농도 1, 이태원참사특별법 모두 제재 ★

실제로 선방위는 3월 14일 MBC TV <MBC 뉴스데스크>가 일기예보를 하면서 미세먼지 농도 1을 파란색 숫자로 그래픽 처리한 것이 특정 정당을 위한 불법선거운동이라며 법정제재를 전제로 한 의견진술을 의결했습니다. 해당 안건이 상정될 때부터 '황당한 코미디 같다!?'라며 여론의 질타를 받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보기 어렵다"라고 판정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의견조차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공정선거를 위해 운영되는 선방위가 중앙선관위조차 패싱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급기야 선방위는 법적으로 규정된 권한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하고 자의적으로 칼을 휘두르는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정부여당에 조금이라도 불리하다 싶으면 그것이 선거와 관련된 보도든 아니든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며 제재대상으로 삼습니다. 3월 7일에는 이태원참사특별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비판적 논조로 다뤘다는 이유로 cpbc 가톨릭평화방송 프로그램에 법정제재 전 단계인 의견진술을 결정했습니다.

1월 30일에 방송된 cpbc 가톨릭평화방송 FM <김혜영의 뉴스공감>에서 진행자가 "김광호 전 서울경찰청장만 떠밀리듯이 재판에 넘겨진 상황이고 아무도 책임을 진 사람은 없는 상태"라고 말하고, 김준일 평론가가 "정치적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은 것에 대해 국민들이나 유가족들이 분노하는 것 같다"라고 했는데 이런 발언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방위 권재홍 위원(공정언론국민연대 추천)은 "이태원참사로 23명이 기소되고 6명이 구속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법 조치를 받지 않은 것처럼 끌고 나간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며 분개했고, 최철호 위원(국민의힘 추천)은 해당 방송이 '정치적 목적'의 '가짜뉴스, 왜곡뉴스'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혐의 처분되고, 윤희근 경찰청장은 입건 전 내사 종결로 처리되고 잠시 구속되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마저 보석으로 나와 여전히 구청장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박희영 구청장에 관해 검색해 보니 가장 최근 뉴스는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용산구청에서 운영하는 <청렴 라디오> 첫 방송에 일일 DJ로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라며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이 담긴 기사입니다.

이태원참사의 진짜 책임자들과 윗선은 거의 다 빠져나가고 일선 실무 부서장급만 재판받는 게 문제라는 점을 언론이 지적했는데 대체 무엇이 가짜이고 왜곡일까요? 아니면 선거가 끝날 때까지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무슨 잘못을 하든 눈 감고 입 막고 좋은 말만 골라 하는 게 공정한 방송일까요?

★ 친정부언론은 심의에서 열외 ★

선방위의 심의 기준과 잣대는 시민의 상식으론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만큼 편향적입니다.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불리하다 싶으면 선거와 관련된 방송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전천후로 응징을 가하면서, 정부 여당에 옹호적인 방송에 대해선 관대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뇌물수수 의혹을 '외국 회사의 조그마한 백'으로 인한 해프닝 정도로 애써 축소하며 대통령 홍보방송을 내보낸 KBS 대통령 대담에 대해 선방위는 안건으로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TV조선 <시사쇼 정치다>는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국민의힘 유세현장을 3월 7일과 8일에 생중계했고, 진행자는 "시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한동훈 위원장에게 환호를 보내주면서 굉장히 분위기 좋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코멘트했습니다. TV조선은 다른 정당의 유세현장을 생중계로 보도한 적이 없습니다.(관련기사 : 자녀 돌보는 사진까지... 종편의 도넘는 '한동훈 띄우기' https://omn.kr/27to7) 한 눈에 보이는 이런 공정성과 형평성의 문제에 대해 선방위는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부 종편방송은 철저하다. (MBC, CBS와 달리) 패널 구성에 엄격하다"(최철호 위원)라며 대놓고 두둔하는 발언까지 내놨습니다.

채널A <뉴스 TOP 10>도 3월 5일 한동훈 비대위원장의 청주 유세 소식을 전하며, 한동훈의 어린 시절 사진을 게재하고 '본이 청주, 청주 한씨'라고 소개하는 등 낯뜨거운 홍보성 방송을 내보냈지만 선방위의 제재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법무부 장관 시절부터 한동훈 비대위원장에 대해 '조선제일검 한동훈', '한동훈의 시간'과 같은 자막을 올리며 반복적으로 국민의힘 편향적인 방송을 해 온 채널A에 대해 민원이 제기되었지만, 선방위는 '여권 출연자와 야권 출연자 비율을 잘 맞췄다'라며 문제없다는 의견으로 마무리한 바 있습니다.

★ 막장 드라마의 결말은? ★

휘어진 거울로 세상을 보면 모든 사물이 왜곡됩니다. 굽은 것은 곧은 것으로, 곧은 것은 굽은 것으로 비칩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류희림 위원장(대통령 추천)과 황성욱 상임위원(국민의힘 추천) 2인의 합의만으로 위원을 인선하고, 야권추천 위원들이 퇴장한 채 여권추천 위원 4명의 의결로 결정된 선방위는 그 태동부터 휘어진 거울로 만들어진 채 출범했습니다.

과거 권언유착과 노조탄압에 앞장섰다가 해임된 언론인이거나 권력 친화적 강경보수로 이름난 인사들이 대부분인 선방위가 '선거방송의 공정성을 위해' 작동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렇다 해도 역대 최고기록을 갈아치울 만큼 중징계를 자의적으로 남발하는 행태는 지금껏 없었던 일입니다. 총선 D-Day가 다가올수록 선방위의 정권 보위를 위한 표적심사와 벌점테러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막장 드라마의 끝장입니다.

이런 부조리를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유신시대, 막걸리보안법의 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국가에 의한 방송심의 자체를 폐지하자는 강경론부터, 정치적 공정성에 대해서는 법정 제재가 아닌 행정지도만 가능하게 하자는 온건론까지 정책 대안을 두고 시민사회와 언론계, 학계에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충분한 숙의과정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번 선방위가 내린 위헌적이고 몰상식한 결정을 전면 취소하는 한편 부당한 권력남용에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와 같은 선방위의 파행을 막기 위해 22대 국회는 새로운 대안을 내놔야 할 것입니다. 진영을 넘어서서 민주주의를 복원하기 위한 시민들의 지혜와 언론인들의 용기가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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