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자주 틀어놓습니다. 계엄 이후 심화된 습관입니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 MBC '뉴스바사삭'과 '정치인싸' 등을 주로 듣습니다. 올초부터는 TV 시사 토론 프로그램도 부쩍 늘어 볼 게 더욱 많아졌습니다. JTBC '썰전'이 종영 6년 만에, MBC '손석희의 질문들'이 파일럿 방송 6개월 만에 다시 시작됐습니다.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의 시사 프로그램을 자주 보고 듣는 것은, 그나마도 여타 유튜브 채널에 비해서는 팩트체크를 꼼꼼히 하리라는 믿음에서입니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특히나 정치 이슈를 다루는 코너에서 패널들은 '그 나물에 그 밥' 아니 '그 남자에 그 남자'입니다. 지난달 29일 돌아온 '손석희의 질문들'의 포문을 연 이는 유시민과 홍준표였습니다. '유시민 VS 홍준표'는 MBC '100분 토론'에서부터 수십년 간 이어져 온 구도입니다. 지난 달 15일부터 시작돼 4회분이 방송된 JTBC '특집 썰전'에서는 패널들 14명 가운데 딱 한 명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만 여성이었습니다. '김현정의 뉴스쇼'는 '놓지마 뉴스'를 제외한 모든 고정 코너의 패널들이 남성이고, '정치인싸'도 진행자인 이선영 아나운서를 제외한 출연자 4명이 모두 남성입니다. 처음으로 여성 비율이 20%를 넘은 22대 국회보다도 못한 성비입니다.
'남자만 쓰는' 풍토 탓에 미디어 수용자들은 남성들의 발화만 듣게 됩니다. 또한 이들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남성 스피커들의 체급을 키워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이들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습니다. 지난 5일, 오랜만에 '썰전'을 찾은 이철희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썰전 덕에 국회의원이 됐다”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안티페미니즘 선구자인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도 2015년 '썰전'에 고정 출연하며 이듬해 열린 20대 총선에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습니다. 이들의 방송 출연분은 온라인에서 '짤'로 도는 한편 많은 언론들이 무한히 받아씁니다.
방송가가 여성 정치 패널을 발굴하지 않는 것은 결국 '의지의 문제'입니다. 지난 해 8월 콜린 크룩스 주한 영국 대사로부터 성비 불균형을 지적받았던 통일부 주최 국제한반도포럼이 불과 이틀 만에 여성 연사를 6명 추가한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해 1월 폐지된 KBS 제1라디오의 '뉴스브런치'처럼 여성 패널을 적극 기용한 사례도 있습니다. '뉴스브런치'는 여성 시선의 시사 프로그램을 표방, 여성 진행자(정용실·신성원 아나운서)에 패널을 '3040' 여성들 위주로 구성했습니다. 정쟁보다는 시민들 피부에 와닿는, 생활과 직결되는 정책을 다루는 데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건강보험 급여 적용 기준의 축소, 고독사 실태, 최저임금 이슈 등에서부터 1인 여성 가구의 주거권, 젠더 폭력, 성별 임금격차 같은 여성들 현안도 다뤘습니다. '여성 시선'의 시사 프로그램은 확실히 생활 전 영역을 정조준했습니다. 당리당략이나 정략적 해법에만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폐지 직전, 그 프로그램에 10개월 간 몸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험 중 하나입니다.
'뉴스브런치' 폐지 이후 선택의 여지없이 남성 시선의 시사·정치 프로그램만 즐비하다보니 주변 여성들로부터 '들을 만한' 팟캐스트, '볼 만한' 유튜브 소개해달라는 얘길 많이 듣습니다. 자주 추천하는 게 언론개혁시민연대와 서대문FM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페미묻다'입니다. 딥페이크 성착취를 시작으로 디지털 성폭력과 인공지능(AI), 윤석열 탄핵 집회를 계기로 한 여성의 광장과 정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방송의 정치 프로그램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제도 정당 바깥의 상상력'(장여경 정보인권연구소 상임이사) 같은 것들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플랫폼입니다.
편중된 성비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사 프로그램의 쇼 비즈니스적 특성에 대한 재고도 필요합니다. 책 <엘리트 포획>을 쓴 올루페미 O.타이워 미국 조지타운대 철학과 부교수는 지난 해 10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 '토론은 이제 그만!'(Please, No More Debates!)에서 “근본적으로 토론은 게임화된 대화”이며 “게임의 요점은 아이디어 공유가 아니라 승리”라는 주장을 폅니다. 당시는 미국에서는 공화당 J.D.밴스 후보와 민주당 팀 월즈 후보 간 부통령 선거 토론에 불이 붙었던 때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tvN '알쓸신잡'에서 “정치 토론이란 지지하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무기를 공급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결국 TV 토론이란 타협의 여지 자체를 상정하지 않고 지지층에 '보여주기'에 특화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탄핵 국면 이후, 광장에서는 다양한 소수자 의제가 쏟아져 나오는 한편으로 새로운 정치에의 갈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TV에서 거듭하던 '남자들의 토론'이 늘 네거티브 정치 공세만 이어가던 것에서 벗어나, 다양한 삶의 양태를 정치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얘기가 필요합니다. 'Win or Nothing'(승리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의 세계가 아닌,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질문에 재질문을 거듭하며 실현 가능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는 곳으로서의 시사 프로그램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을 '뉴스브런치'와 '페미묻다'에서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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