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나는 주한유럽연합대표부(EEAS) 사무실에서 서지현 전 검사, 몇몇 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EU의 인권특별대표를 만났습니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딥페이크 사태의 현황과 대응방안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한국 정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성평등을 위한 노력을 강화해 주길 부탁드린다"라고 언론보도를 통해 밝혔습니다. 딥페이크 사태, 정부의 여가부 폐지 등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습니다.
이 만남 이전에는 호주대사관에서 과거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대응 등 전문위원회 위원들을 초청하여 같은 주제로 간담회를 했습니다. 간담회에는 캐나다, 프랑스, 미국, 스웨덴 등 주요 국가의 주한대사관에서 2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딥페이크 사태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새삼 느꼈습니다.
그들은 딥페이크 영상을 '아동청소년포르노'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는 주로 합성물, 음란물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딥페이크 영상을 피해자가 존재하는 성착취물이라고 전제했습니다. 우리는 남자아이들이 합성 장난을 칠 수도 있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영상물에 대한 법적 규제체계가 음란물을 중심으로, 피해자 개인의 법익이 아닌 건전한 사회질서라는 사회적 법익 침해행위에 대한 제재 정도로 가볍게 이뤄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식에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반발, 젠더 이슈를 편 가르기로 이용한 정치세력의 승리까지 더해져 대한민국의 디지털 성범죄는 오늘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미국의 사이버 보안업체 시큐리티 히어로(Security Hero)의 딥페이크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온라인에 있는 딥페이크 영상 중 98%가 포르노이며, 피해자의 99%를 차지하는 여성 중 53%가 한국 여성으로 전 세계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현실이 이러하니 주요 국가 대사들이 보기에 대한민국은 안전한 나라, 신뢰할 만한 나라가 아닙니다. 북한의 안보 위협에 더하여 이제는 디지털 성범죄를 전 세계에 퍼뜨릴 수 있는 위험한 나라입니다. 세계 최대의 아동포르노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에게 고작 징역 1년 6개월짜리 처벌밖에 내리지 못한 나라, 판사가 후속 수사를 이유로 그의 미국 송환을 거부했지만 제대로 된 후속 수사도 하지 않은 나라, 이런 대한민국에서 딥페이크 사태는 예정됐지만, 예방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대한민국은 왜?'라는 질문을 연이어 했습니다.
딥페이크 영상은 그냥 합성 사진이 아닙니다. 같은 반 여자아이가 SNS에 올린 얼굴 사진을 캡쳐해서 프로그램에 업로드하면 5초 만에 그 아이가 알몸으로 강간 당하는 영상이 됩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제작한 자가 제대로 수사받고 있을까요?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지인 포르노를 공유하던 남학생들은 제대로 조사받고 있을까요?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 일이라 개별 사건의 수위와 내용은 제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학생들은 여전히 자기 사진이 어떤 식으로 딥페이크에 이용되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채 가해학생들의 수사 진행 정보조차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딥페이크 사건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국가가 범죄피해자들을 대해 온 방식이 딥페이크 사건에서도 적용되는 것인데, 문제는 딥페이크와 같은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어떤 범죄를 당했는지 먼저 고소하거나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의 수사 시스템만으로는 신속한 대응이 더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잠재적) 피해자들은 당연히 장기간 불안하고, 분노하고, 불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가 정말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성착취물 발견 즉시 플랫폼에 삭제를 지시하거나 제재하고, 유포를 막아야 합니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삭제 비용 등을 엄격하게 부담시키는 한편 재범을 하지 않도록 교육하는 등 일련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국회와 정부는 디지털 범죄 컨트롤 타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가부를 대책 없이 폐지하겠다고 하면서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언론이 잠깐 주목할 때 정치권도 반짝 관심을 보일 뿐입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n번방 사건'을 계기로 처벌 범위와 수위가 대폭 강화됐습니다. 문제는 이번에도 처벌 강화만 얘기할 뿐 근본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정부와 국회가 관심과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딥페이크 성범죄물에 대해 지난 7월까지 단 한 건도 경찰에 수사의뢰를 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심지어 지난 6월 초 수사의뢰 계획을 밝히고도 두 달 넘게 손을 놓고 있다가 지난 8월 말 윤석열 대통령이 엄정 대응을 지시하고 나서야 수사를 시작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 효과적인 대응이 될까요?
필자가 참여했던 과거 법무부 디지털 성범죄 대응 등 전문위원회는 수년 전 이미 근본적 대안으로 여러 권고안을 낸 바 있습니다. '불법 영상물 삭제 및 차단을 위한 응급조치 신설(결정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심위가 아닌 수사기관의 권한을 강화), 피해 영상물의 효율적인 압수 및 재유포 방지방안, 몰수 제도 개선방안, 실질적인 처벌 강화를 위한 양형 심리 실질화, 피해자 진술권 보장 및 재판절차 통지제도 개선,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별도로 제기하지 않고도 가해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형사배상명령제도 개선방안 등'이 그것입니다. 21대 꽤 많은 국회의원들이 이 권고안에 관심을 보였고 법안으로 발의했지만 거의 통과되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정부 의견을 따르는 편인데 과연 법무부가 이 법안들에 얼마나 찬성 의견을 냈는지, 반대한다면 어떤 보완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국가가 부재하는 대한민국의 몇몇 학교에선 여학생들에게 "각자 SNS에 올린 사진을 내리고 개인정보 보호에 유념하라"라는 지침을 내렸습니다. SNS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사진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표현의 자유이고 숨 쉬듯 자연스러운 소통입니다. 물론 이는 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 신뢰는 안전에 대한 것이고 안전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해 학생에 대한 신속하고 엄정한 처분, 영상물 삭제 등 플랫폼에 대한 책임 부과, 변화하는 범죄양상에 대응하는 수사시스템 개선 노력 대신 학생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조심하고 정숙하고 위축되어라'를 외치는 학교와 대한민국, 아동포르노에 관대하다는 오명을 벗을 수나 있을까요?
"대체 대한민국에선 개인들이 얼마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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