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의 주택, 최명희(58·여)는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에 늦은 밥상을 차렸습니다. 오랜만에 아들이 좋아하는 스테이크를 구워 집안엔 연기가 가득 차올랐습니다. 아들을 위해 차린 밥상에는 스테이크에 더해 피자, 치킨, 잡채, 과일이 잔뜩 올랐습니다. 모두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이었지만 명희와 마주한 자리에 아들은 없었습니다.

영정 사진 속 아들은 활짝 웃는 모습으로 엄마가 자신을 위해 차린 밥상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떠나간 뒤로 명희는 매년 홀로 아들의 제사상을 차렸습니다. 예법에 맞건 맞지 않던 아들이 좋아했던 음식이 생각나면 해마다 음식을 찾아 올렸습니다. 올해는 초콜릿 과자도 식탁에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 전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렸어요. 그런데 있을 때 잘해줬어야지… 나중이 어딨어… 죽어서 이렇게 잘해주면 뭐 해요." 아들을 떠나보내고 지내온 7년의 세월에 이제는 조금은 덤덤해졌다면서도 명희는 끝내 옷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적막해진 아들의 방에서는 엄마의 흐느낌과 제사상에 함께 올린 맥주에서 거품이 사그라지는 소리만 남았습니다. 아들이 엄마와 즐겨 마시던 호가든 맥주였습니다.

★ 1. 막을 수 있었던 죽음

명희의 아들 최준은 7년 전인 2016년 6월 22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물한 살 생일이 지나고 딱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서초구의 한 주민센터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던 최준은 사망 당일 한 민원인으로부터 창구를 잘못 알려줬다는 이유만으로 폭언을 들었습니다. 주변에 함께 일하던 공무원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 않았습니다. 민원인이 센터를 떠난 뒤 분을 참지 못한 최준은 근무지를 뛰쳐나가 한남대교로 향했고, 그것이 최준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2009년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최준은 이후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아왔습니다. 하지만 2014년 군 입대를 앞둔 첫 신체검사에서 '현역대상' 판정을 받고 이듬해 4월 훈련소에 입영했습니다. 질환 때문에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을 게 당연했습니다. 최준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재검 대상'으로 분류돼 귀가했습니다.

병역은 면제되지 못했습니다. 최준은 재검에서 '4급'으로 분류돼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됐고 2015년 9월 센터에 배치됐습니다. 그에게 배정된 업무는 '팩스 민원 보조'였지만 실제로는 민원인과 계속해 대면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최준은 구청에 제출한 신상명세서를 통해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밝혔음에도 신분증 확인, 민원서류 발급 등의 업무를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최준이 선임으로부터 받았던 '주요업무 매뉴얼'에는 민원인의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입국 기록, 토지대장, 거소증명 등의 문서를 대신 발급받는 등의 업무 절차가 적혀 있었습니다. 특히 이 매뉴얼에는 공무원들의 내부행정망인 '새올' 시스템에 로그인해 일부 민원 처리를 하는 방법도 적혀 있었습니다. 사회복무요원이 단독으로 개인정보가 담긴 이런 민원을 처리하는 것은 개인정보보호법과 전자정부법에 위반될 수 있습니다.

권한에 맞는 업무인지를 떠나서 사람을 대면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질환을 가졌던 최준에게 민원업무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사망하기 2개월 전인 2016년 4월 14일에도 민원업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근무지를 뛰쳐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최준은 한남대교 방향으로 향했으나 뒤따라간 공무원과 경찰이 제지해 귀가했습니다.

돌아온 최준은 '자살 생각은 없었다'라고 했지만 주변 직원에게 자살 시도로 보일 만큼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이 사건 직후 그가 서초구정신건강복지센터 상담사와 상담한 대화를 보면 "제일 힘든 건 민원인 상대하고 그러는 거죠. 저는 사람들 만나는 걸 힘들어하고 싫어하는데 자꾸 민원인 계속 만나야 하고…"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한차례 소동이 있고 최준은 잠시 민원담당 업무에서 배제됐습니다. 명희는 이때 다시 아들의 건강이 조금 회복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망 당일 다른 사회복무요원이 반차로 자리를 비우자 센터는 최준에게 민원업무를 대신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터졌습니다.

명희는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비극을 부추긴 시스템에 분노했습니다. 실제 최준의 죽음은 2018년 12월 보훈처에서 업무연관성이 있는 '순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보훈처는 '관리기관 내 신상관리 미흡'과 '재발성 우울증 악화'가 최준이 사망에 이르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 2. 아직도 한강을 보면…..

지난 22일 사회복무요원 노동조합은 최준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서울 용산구 서빙고로91나길 2-3)에서 그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최준을 위해 소리굿을 연 사회적협동조합 '살판'의 소리꾼은 구성진 목소리로 최준의 영혼을 부르고 달랬습니다.

이날 명희는 아들이 사망한지 꼭 7년 만에 처음으로 한강을 찾았습니다. 7년 전 '혹시나'하는 마음에 아들을 찾아 한강변 수풀을 뒤졌던 그날 이후 TV에서라도 한강이 나오면 마음이 울렁거렸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애써 고개를 돌렸습니다.

최준을 추모하기 위해 간이 책상으로 만들어 놓은 제단에는 영정사진과 함께 신발 한 켤레가 올랐습니다. 최준이 생전 사두었다가 한번도 신어보지 못한 채 두고 간 나이키 신발이었습니다. 명희는 아들이 마지막으로 집을 나가던 날 다 떨어져 빗물이 새던 신발을 신고 나간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려 신발을 버릴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넋이로다 넋이로다 최준 요원의 넋이로다. 극락으로 가자서라." 소리꾼은 소리 높여 최준의 명복을 빌었고 주변엔 그가 피워 놓은 쑥향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소리굿의 북소리, 장구 소리가 커지자 명희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흔들어 떨구며 통곡했습니다.

추모제를 위해 명희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 명희는 "내 아들이 몸이 쾌유될 때 까지 충분한 병가를 주었다면 우울증이 있었다 해도 아이가 불행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적은 급여로 제게 밥을 사주던 아들이 미치도록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아들이 사놓고 신지 못한 새 운동화가 아들 없는 방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 3. "이런 죽음 또 없어야"

지난 27일 서초구의 한 카페, 명희는 아들의 추모제가 끝나고 나서 정신이 줄곧 없었지만 오픈 시간에 맞춰 가게 문을 열었습니다. 이전에도 서초구에서 카페를 하던 명희는 아들이 떠나고 난 뒤 약 1년간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지금 자리에 다시 카페를 열었습니다.

명희의 카페 메뉴판에는 하단에는 "나는 왜 '이처럼'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고 있나?"라는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명희가 아들을 잃고 새로 카페를 열며 새겨놓은 문구입니다.

메뉴판 위 문장처럼 명희는 불행한 일만 끊임없는 반복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2011년 7월 27일 '우면산 산사태' 때 삶의 기반이었던 가게가 흙에 파묻히면서 순식간에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한 경험을 했습니다.

명희는 카페 운영 사정도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19로 제대로 장사를 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들을 보내고 여러 불행이 겹치면서 명희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우울증약과 수면제도 함께 복용하고 있습니다.

명희는 "당장이라도 아들을 따라가고 싶다"라면서도 아들의 죽음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어떻게든 '연명'하며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알리고 다시는 아들과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말하며 아들의 죽음을 기록한 문서들을 매만졌습니다.

대로변이 아닌 명희의 카페엔 점심시간이 지나야 서서히 손님들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손님이 오갈 때마다 카페 정문에 붙은 'Happiness'(행복)이라는 문구가 함께 흔들렸습니다.

※ 최준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2016년 모두 19명의 사회복무요원이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이후 사회복무요원 자살자는 2017년(16명), 2018년(9명), 2019년(10명), 2020년(15명), 2021년(11명), 2022년(11명)으로 매년 10여 명의 젊은이들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최준의 사례처럼 복무 중의 고충으로 극단적 선택까지 고민했던 사회복무요원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전남 함평에서 수문 점검 도중 하천에 휩쓸려 실종된 60대가 29일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지난 27일부터 이어진 장맛비로 주택 9채와 상가 3곳이 파손되거나 침수됐습니다. 여의도 면적의 14배에 달하는 농작물과 농경지도 물에 잠겼습니다.

행정안전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29일 오전 11시 기준 집계된 인명 피해는 실종 1명입니다. 직전 집계치와 변동이 없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37분께 전라남도 함평군 엄다면 엄다천 합류 구간 다리 아래 쪽에서 농어촌공사 위촉 수리 시설 관리원인 A(68·여)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A씨는 지난 27일 오후 10시 32분께 폭우로 불어난 하천 수문을 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외출했다가 물살에 휩쓸린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실종 신고 직후 인원 1000여 명을 투입해 수색을 벌여 신고 장소와 5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A씨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중대본 집계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중대본 관계자는 "전남 함평 실종자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지만 공식 신원 확인은 아직 되지 않았다"라며 "신원 확인 후 사망 집계치로 전환할 예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시설 피해도 더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주택 1채가 파손되고 전남과 전북에서 8채가 침수됐습니다. 전북에선 상가 3곳도 물에 잠겼습니다.

광주 서구 풍암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석축이 붕괴돼 2차 안전점검까지 모두 완료한 상태입니다.

농작물 4017.9ha(헥타르)가 침수 또는 유실·매몰 피해를 봤습니다. 이는 축구장 면적(0.7ha)의 5739.9배, 여의도 면적(290ha)의 13.9배에 달합니다. 벼 3093.0ha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고 콩 903.4ha, 시설하우스 15.4ha, 고추 0.6ha 등입니다.

또 금호동의 한 아파트 상가와 30세대는 정전으로 한때 큰 불편을 겪었습니다. 정전은 낙뢰로 인한 변압기 화재가 원인이었으며 현재 응급복구가 끝났습니다.

공공시설로는 도로사면 유실 3개소, 하천제방 유실 1개소, 공사장 침수 1개소가 크고 작은 피해를 봤습니다.

이날 오전 11시 기준 12개 항로 여객선 14척의 발이 묶여 있습니다.

4개 국립공원 125개 탐방로가 통제되고 있습니다. 둔치주차장 4개소, 둘레길 3개소도 통제 중입니다.

침수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폭우 속 수문 관리를 위해 나섰다가 실종된 60대 실종자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29일 함평소방서에 따르면 A씨(68·여)가 이날 오전 10시 37분쯤 전남 함평군 엄다면 학야리 한 다리 방면에서 소방당국에 의해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A씨가 실종된 지 36시간 만입니다.

A씨는 지난 27일 오후 10시 32분 쯤 호우경보가 내려지자 남편과 함께 급히 현장 점검을 나갔다가 농경지 부근에서 실종됐습니다. 이들 부부는 수문 관리자 역할을 맡았고 A씨는 실족해 하천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A씨는 마을 부녀회장을 맡고 있기도 했습니다.

A씨가 사고를 당한 오후 9시부터 10시까지 1시간 동안 함평에는 71㎜의 폭우가 내렸습니다.

신고를 접수한 소방당국은 경찰과 유관기관에 공동 대응을 요청하고 A씨가 실족한 수문 인근 하류와 상류를 동시에 수색했습니다.

사고 당일 오후 11시 35분에는 긴급구조통제단을 가동하고, 호남특수구조단, 경찰 130여 명, 의무소방대 50명, 함평군청 공무원 150명 등 400명이 넘는 인원이 투입돼 A씨를 수색해 왔습니다.

소방당국은 다리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된 A씨를 수습해 전남 무안군의 한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1995년 6월 29일 목요일 오후. 국내 최대규모를 자랑하던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백화점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금도 많은 국민들이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악의 안전사고로 기억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입니다.

이날 영업중이던 백화점을 찾았던 수많은 손님과 직원 등 1000명 넘는 사람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렸습니다. 이 사고로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다쳤으며 극적으로 구조된 사람은 40명에 불과했습니다. 생존자들도 이후 트라우마 등에 시달리며 고통을 겪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애초 부실공사였던 데다 사고 이전 수많은 전조현상이 나타났음에도 대책이 미흡했습니다. 건축물 안전관리가 허술하고 각종 제도가 미비하면 얼마나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알게 됐습니다.

★ 1. "뚝…드르륵" 붕괴 징후에도 "영업 계속"
28년 전 오늘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685-3, 지금의 서초중앙로 188 일대의 삼풍백화점은 불안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이 건물은 백화점으로 쓰던 A동과, 레포츠센터 등 각종 편의시설이 있는 B동으로 나뉘었는데 A동에서 균열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5층 식당가는 바닥이 서서히 기울었고 천장의 균열로 콘크리트 알갱이가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루 전인 6월 28일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옥상이 내려앉으면서 철근 기둥이 시멘트 바닥을 뚫고 올라왔습니다. 이른바 펀칭 현상입니다. 경비원이 순찰중 식당 바닥에 싱크홀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붕괴의 전조였습니다. 즉시 건물을 비우고 대책을 세웠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대책 없이 6월 29일 날이 밝았습니다.

사고 당일, 4~5층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거나 '드르륵' 하는 진동이 감지됐습니다. 경영진은 옥상 냉각탑의 진동이라도 줄이려 에어컨 가동을 중단했습니다. 그날 백화점 내부가 너무 더웠다는 생존자들 증언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오후엔 긴급히 부른 전문가가 안전진단을 실시했습니다. 건물 균열이 심각하므로 당장 영업을 중단하고 긴급 보수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너인 이준 삼풍 회장, 아들 이한상 사장 등 경영진도 모였습니다. 그중 일부는 즉각 손님들을 대피시키자고 건의했지만 최고 경영진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영업 중단 시 경제적 피해와 이미지 손상만 생각했습니다.

결국 보수 공사를 하기로 했지만 영업은 계속했습니다. 이때라도 손님들을 내보내고 백화점 문을 닫았다면 건물이 무너졌어도 피해규모는 줄였을지 모릅니다.

★ 2. 사망 502명·900여명 부상 초유의 참극

이처럼 여러 차례 '골든타임'이 있었지만 모두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일 오후 5시를 지나며 천장에서 시멘트가 떨어지거나 파열음이 들렸습니다. 붕괴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뚜렷해지자 일부 직원과 고객들은 대피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마침내 5시 57분, 5층 슬래브가 폭삭 주저앉으면서 4층을 짓눌렀습니다. 이 충격이 아래로 그대로 전달되며 4층부터 지하 3층까지 순식간에 포개지는 수직 붕괴가 발생했습니다. 지상 5층, 지하 4층 건물이 무너지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고 이후 현장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콘크리트 구조물 아래 처참하게 깔렸고 부상자들은 현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사투를 벌였습니다.

중장비 수십대, 구급차 소방차 등 100여대가 왔지만 초기 수습은 어려웠습니다. 주변 도로가 꽉 막히면서 구급차 진출입이 난항을 겪었습니다. 중장비를 현장 가까이 대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남아있는 A동의 바깥 부분과 B동 전체도 안전하지 않아 2차 붕괴 위험이 컸습니다.

군경, 소방대원 등이 수작업으로 구조 및 수색에 나섰습니다. 하루 뒤부터 생존자들이 구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사고일부터 11~17일 지난 기간에 차례로 구출된 최후의 생존자 3명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합니다. 최명석(남성), 유지환(여성), 박승현(여성) 입니다.

당시 뉴스 중계를 보면 "가스 폭발에 의한 사고로 추정된다"라는 멘트도 나옵니다. 멀쩡해 보이던 건물이 완전히 주저앉았다는 사실은 상상하기도 힘들었던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은 대체 왜 무너졌을까요?

★ 3. 공사도 안전관리도 부실·무책임

삼풍 소유주 이준 회장은 중앙정보부 출신으로, 정보부를 나온 뒤 부동산과 건설업에 눈을 떠 사업을 키웠습니다. 그의 삼풍건설은 1974년 강남의 미군 숙소부지를 매입했습니다. 이후 강남개발이 본격화하며 엄청난 땅값 상승 차익을 누립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 백화점 건물을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무시했던 걸로 보입니다. 이곳은 애초 주거용도여서 상업시설을 지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 회장은 서울시에서 용도 변경을 받아냈습니다.

공사 기간 수차례 구조변경을 했는데 안전과는 거리가 먼 방향이었습니다. 자재 비용과 공기를 줄이려 기둥은 계획보다 가늘어졌고 안전을 위한 시공은 무시됐습니다. 탁 트인 내부공간을 만들고, 하나라도 많은 매장을 넣고자 원래 있어야 할 벽체는 사라졌습니다.

1989년 준공과 개장 이후도 문제였습니다. 옥상 냉각탑을 무리하게 옮기면서 진동과 무게가 가중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삼풍백화점은 사고가 일어나기 수 년전부터 조금씩 이상이 감지됐습니다.

★ 4. 회장일가 전재산 헌납…흔적없이 사라진 회사

사고 이후 여론은 극도로 악화했습니다. 관련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요구가 들끓었습니다. 이준 회장은 업무상 과실치상, 뇌물공여죄 등이 적용돼 7년 6개월형을 받았습니다. 아들 이한상 사장은 7년형이었습니다. 당국 공무원들이 형식적으로 준공을 승인하거나 사용허가를 내준 사실도 나중에 드러나 관계자들이 처벌받았습니다.

이준 회장 일가는 추징금에다 손해배상금 재원으로 써달라며 전재산을 서울특별시에 헌납했다. 손해배상 처리 또한 서울시에 일임했다. 서울시는 이 돈에 시 재원을 더해 사망자 유족 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백화점을 운영하던 삼풍건설은 사라졌고, 관계를 맺고있던 중소기업들도 부도가 났습니다. 삼풍 직원은 물론이고 관계사 임직원들까지 일자리를 잃는 고통을 겪은 셈입니다.

다만 이 사고에 국가배상 책임은 없는 걸로 대법원이 판결했습니다.

백화점 A동 붕괴 후에도 B동은 서 있었으나 이 또한 붕괴위험이 큰 걸로 나타나 폐쇄됐습니다. 이어 1998년 10월부터 철거했습니다. 이 자리에 지금은 주상복합아파트가 건설됐습니다. 백화점 바로 옆에 세웠던 삼풍아파트는 지금도 건재한 가운데 재건축을 추진 중입니다.

★ 5. 사고 그후, 달라진 것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안전과 생명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극적으로 높였습니다. 건설, 소방 방재, 의료계 등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건설업계에선 이 건물처럼 천장과 기둥 사이에 보를 쓰지 않은 건축법은 기피하게 됩니다.

소방, 의료, 경찰 등은 각각 사고수습 현장본부를 뒀지만 이들을 통솔하는 컨트롤타워가 없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 같은 대형 재난 사고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메뉴얼을 갖추지 못한 게 대한민국 현실이었습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사고 현장을 사상 최초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소방본부가 화재진압뿐 아니라 각종 안전사고 대응까지 맡도록 바뀌었습니다. 소방본부에 119 구조단을 신설한 것도 이 사고 이후입니다.

한편 응급의학 및 응급의료체계가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1995년 응급의학이 전문 진료과목으로 인정받았고 이듬해 1996년부터 응급의학전문의가 배출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서울 양재동 양재시민의숲에는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서 있습니다.

※ 참고 자료 : SBS TV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편(2021.6.11)

"그때 우리가 더 모질게 싸워서 세상을 좀 안전하게 만들었어야 했는데, 싸움이 부족했던 거 같아요."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사회적 재난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이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29일 한자리에 모입니다. '서울 번영의 상징'이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린지 2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반복되는 참사에 함께하는 피해자 단체만 8개에 이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비롯해 ▲4·16 세월호 참사 ▲태안 해병대 참사 ▲대구 지하철 참사 피해자 단체 등입니다. 서울 양재시민의숲 남측 삼풍백화점 추모비에 다른 참사의 피해자들이 연대해 함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본 추모식 행사 시작 전인 오전 10시부터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 권리 선언' 등을 낭독합니다. 추모식 이후에는 현재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선 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토크 콘서트 등을 진행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피해 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추모곡 '그날처럼 오늘도'를 4·16 세월호 참사 합창단이 헌정 공연을 합니다.

김문수 삼풍유족회 섭외부장은 "이런 일을 먼저 겪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미안함을 느낀다"라며 "서로 같은 입장에서의 위로가 가장 큰 위로가 되니까, 함께해 주시는 게 감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마다의 처참한 생활을 견디고 있는 이들은 아직도 '싸움'의 필요성을 말합니다. 참사를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사회 안전망은 위태롭고, 국가가 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그는 "유족회를 대표해서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침몰 사고, 광주 아이파크 붕괴 사고, 이태원 압사 참사 등 현장을 올해부터 가고 있다"라며 "또 다시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참사 유족들이 한결같이 하는 소망이다. 우리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난 참사 피해자들은 연대를 보다 공고히 한다는 계획입니다. 연대 모임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내달 첫 회의를 가질 예정입니다. 이들은 ▲재난 피해자 권리 옹호센터 설립 ▲생명안전기본법 공론화 등을 추진할 방침입니다.

박성현 4·16 재단 팀장은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여럿이 함께 싸우는 게 의미 있지 않느냐"라며 "지금까지 많은 제도나 법을 바꿔오는 과정에서 각각의 노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노력을 함께하자는 의미"라고 밝혔습니다.

삼풍백화점 28주기 추모식은 이를 공론화하는 자리가 될 예정입니다.

박 팀장은 "세월호 참사 발생 당시에도 다른 재난 참사 피해 가족들이 오셔서 응원해 주셨고, 해외 연대체 사례를 보며 필요성에 많이들 공감하셔서 준비를 시작하게 됐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 측도 "아직 진상 규명이 안 된 참사 유가족들이 공감을 많이 하고 있다"라며 연대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0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지상 5층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건으로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을 기록한 국내 최악의 단일 인재 사고로 남아있습니다.

환경부(장관 : 한화진)는 지난 625일 전국적인 장맛비가 시작된 가운데 환경부 소관 댐 유역에 많은 비가 내려 62816시부터 남강댐의 수문을 열어 홍수 조절을 하고 있으며, 횡성댐도 629일부터 수문 방류를 실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강우로 인해 댐의 수위가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고 주말까지 추가적인 강우가 예상됨에 따라 남강댐은 62816시부터 수문을 개방해 초당 1,500(남강본류 300, 가화천 1,200)이내에서 단계적으로 방류량을 증량할 계획이며, 횡성댐도 629일 수문 방류할 계획임을 사전 예고했습니다.

현재 모든 다목적댐의 수위는 홍수기제한수위 아래를 유지 중으로 총 68.3억 톤의 홍수조절용량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는 425 상당의 강우를 추가로 저장시킬 수 있는 양에 해당합니다.

환경부 손옥주 수자원 정책관은 "향후 기상 및 수문 상황에 따라 댐별 방류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해 운영할 계획"이라면서, "홍수기 집중호우에 대한 사전 준비와 철저한 대응으로 홍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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